1931년 증류된 위스키가 88년을 버텼다
매년 2%씩 증발한다는데…어떻게 보존됐을까?
1931년 3월 5일.
스코틀랜드의 한 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위스키 원액이 스페인 헤레스에서 가져온 유럽산 오크 셰리 캐스크에 담겼습니다.
그리고 이 위스키는 무려 88년 동안 오크통 속에서 숙성됐습니다.
이 위스키의 이름은 ‘더 발베니 1931 컬렉션 88년(The Balvenie 1931 Collection 88 Year Old)’.

2026년 공개된 이 제품은 현재 더 발베니가 선보인 가장 오래 숙성된 위스키이며, 단 17병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의문이 생깁니다.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조금씩 증발합니다.
이를 흔히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릅니다. 숙성고의 온도와 습도, 통의 크기와 상태 등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장기간 숙성에서는 상당한 양의 원액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년 일정량씩 증발한다면…
어떻게 88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 ‘천사의 몫’ 때문에 오래 숙성할수록 위스키는 줄어든다
위스키가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통은 완전히 밀폐된 용기가 아닙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오크통은 미세한 틈을 통해 공기와 수분이 드나들고, 숙성 환경에 따라 알코올과 물이 조금씩 증발합니다.
이렇게 증발하는 위스키를 ‘천사의 몫’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단순히 생각하면 80~90년씩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액의 양이 계속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너무 오래 숙성하면 단순히 양만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크에서 지나치게 많은 성분이 추출되면서 위스키의 맛이 지나치게 떫거나 나무 향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즉,
‘오래 숙성한 위스키 = 무조건 좋은 위스키’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남으면서도 좋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 1931년의 발베니는 어떻게 88년을 견뎠을까?
이 특별한 위스키는 1931년 3월 5일 캐스크 No.239에 담겼습니다.
스페인 헤레스에서 조달한 유럽산 오크 셰리 캐스크였습니다.
이후 발베니의 숙성고에서 여러 세대의 장인과 몰트 마스터들의 관리 아래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2019년.
당시 몰트 마스터였던 켈시 맥키니가 이 위스키를 확인했고, 더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을 계속하기보다 이제 최고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판단해 병입을 결정했습니다. 위스키는 43.2% ABV의 자연 도수로 병입됐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88년 동안 무조건 방치한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상태를 지켜보면서 ‘언제 병입할 것인가’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 사실 ’88년 숙성’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
80년, 90년 숙성이라는 숫자만 보면 단순히 ‘오래된 위스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오크통 자체도 노화합니다.
위스키는 조금씩 증발하고, 나무의 상태도 변합니다.
따라서 아주 오래된 원액을 보유한 증류소라 하더라도 모든 원액이 80~90년 숙성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캐스크가 살아남았고, 어떤 캐스크를 적절한 시점에 병입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번 1931 컬렉션 역시 88년이라는 기록 자체뿐 아니라,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캐스크를 보존하고 관리해왔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습니다.

■ 왜 하필 1931년인가?
1931년은 발베니에게도 특별한 해였습니다.
바로 이때 발베니의 자체 몰팅 플로어(Home Malt Floor)가 문을 열었습니다.
오늘날 발베니가 강조하는 전통적인 수제 맥아 제조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컬렉션의 이름도 단순히 ’88년산’이 아니라 ‘1931 Collection’이 됐습니다.
1931년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위스키와 그해 시작된 발베니의 전통을 하나의 컬렉션으로 묶은 셈입니다.
■ 88년 위스키는 어떤 맛일까?
88년이라는 긴 시간이 맛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발베니 측이 소개한 향에서는 꿀, 은은한 민트, 버터 퍼지, 헤더, 젖은 양치식물, 오래된 가죽과 흙의 뉘앙스 등이 언급됩니다.
맛에서는 크리미한 토피와 꿀, 따뜻한 향신료, 풍부한 오크 향 등이 이어지고 긴 피니시가 특징으로 소개됐습니다.
단순히 알코올이 강한 위스키가 아니라 오랜 세월 오크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풍미가 핵심인 셈입니다.
■ 그래서 17병밖에 없다
88년 동안 살아남은 캐스크에서 나온 위스키인 만큼 생산량도 극히 적습니다.
전 세계 단 17병.
2019년에 이미 병입됐고, 2026년에야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현재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인 대중 판매 제품이라기보다 프라이빗 고객과 컬렉터를 대상으로 한 초희귀 제품입니다.
이 때문에 공개된 판매가격도 일반적인 위스키처럼 쉽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 결국 ‘시간’을 병에 담은 위스키
1931년에 만들어진 위스키 한 통이 88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2019년 병에 담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7년의 시간이 흐른 2026년, 비로소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한 병에는 단순히 위스키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31년의 스코틀랜드,
그동안 이어진 증류소 장인들의 손길,
88년 동안의 숙성,
그리고 매년 조금씩 사라져간 ‘천사의 몫’까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초고숙성 위스키의 진짜 가치는 단순히 ‘몇 년산인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가에 있습니다.
매년 조금씩 증발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위스키.
1931년의 한 캐스크가 88년이라는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가 바로 더 발베니 1931 컬렉션 88년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위스키의 가장 귀한 성분은 오크통에서 얻은 향과 맛이 아니라,
88년이라는 시간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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